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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Overture] - 5(완)

나는 쯔반의 뒷발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쯔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나는 이제 슬슬 하루 일과 시작하러 가볼게." 쯔반은 무심하게 의자에 철퍼덕 엎드려 쓰다듬음을 받아들였다. ‘좀 더 있다가. 여기 햇살이 따뜻해서 잠이 잘 오는걸?’ 쯔반의 말에 나는 오늘 하루는 조금 천천히 시작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단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었기에 쯔반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쯔반아, 누군가와 함께 '감정'을 수확하는 일은 처음이라 묻는 건데, 왜 '그녀'와 같은 집행자들은 정확한 날짜에 감정을 수확하려 하는 거야?" 나는 정확한 날짜를 고집하는 '그들'의 의도가 궁금해 물었다. ‘짧게 설명해 줄게. 인간들이 스스로 만..

카테고리 없음 2025.09.22

서곡 [Overture] - 4

오전 10시 30분, 비즈타워 290 앞. 기민정은 발현지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직 ‘그녀’와 쯔반, 선우 진을 만나지 못했다. 어제 ‘그녀’와의 계약, 그리고 쯔반과의 계약을 마친 기민정은 어쩐지 밝은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구도자’가 되고 나서, 아니 자신이 구도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그녀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자신을 옭아매던 집착도 내려놓게 되었고, 무엇보다 ‘감정’이라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던 인생이 한순간에 달라져 버렸다. 건물의 모든 면이 파란 통유리로 감싸져 있는 건물. 길 건너 멀리서 그녀는 오른쪽 눈을 감고, 건물 아래층부터 꼭대기층까지 하나하나 세어 보았다. 아마도 햇빛을 반사하는 파란 건물을 향해 한쪽 눈을 감고 찡그리며 바라보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

카테고리 없음 2025.09.21

서곡 [Overture] - 3

"삑… 삑…!" "물건 좀 더 고르고 와서 계산하겠습니다." 바코드가 찍히는 소리가 들리는 중, 나는 점원에게 말해 계산을 미루고 가판대를 가림막으로 삼아 다른 '인지자'를 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인지자는 단순히 알아차리고 인지하는 것만 하는 존재는 아냐. 동시에 숨어 있는 다른 경쟁자를 인지하거나 색출할 수도 있지.’ 그녀는 내가 인지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인지자의 역할 수행 방법과 '우리들' 외의 존재들도 알려주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가 나는 것, 심지어 음식이나 음료에서 나는 맛까지 네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순간이 올 때가 있어. 특히 발현지에서의 이질감은 다른 경쟁자가 주변에 있다는 뜻임을 잊지 ..

카테고리 없음 2025.09.19

서곡 [Overture] - 2

출근 시간을 피해 도착한 역 출구 거리는 다행히도 한가했다. 나는 한쪽 어깨에 카메라를 걸고,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그 너머를 바라보며 걸었다. 가로수 그늘이 아직 사선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이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틈을 따라가면, 오늘 찍을 피사체는 입체적으로 살아날 것 같았다. 주소를 다시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기니, 은빛 명판이 눈에 들어왔다. ‘비즈타워 290’ 푸른빛 통유리는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며 건물 전체를 깔끔하게 감싸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이는 철골조 구조가 차갑게 단단해 보였고, 1층에는 편의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편의점을 이용하면 인식을 피해 자연스럽게 건물로 접근할 수 있었다. 편의점은 측면 출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기며 자연스럽게 건물..

카테고리 없음 2025.09.16

서곡 [Overture] - 1

서곡 (Overture) 유년 시절의 꿈을 꾸었다. 갑작스러운 열병에 걸린 나는 약을 먹고, 한기를 느끼며 잠을 청했다. 몸은 떨렸고, 머릿속에서는 알 수 없는 공간감이 피어났다. 나는 무한히 작아지면서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은 끝없이 확장됐다. 거대하고 어두운 공간. 그 중심에는 내가 있었고,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점으로 변한 나는 세상의 모든 물질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자동차, 거리, 사람들, 내가 경험했던 모든 순간과 기억들이 물체가 되어 급류처럼 쏟아져 흘러나왔다. 그 길고 거센 흐름을 나는 그저 바라볼 뿐, 개입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본 그 흐름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이 되었고, 나는 서서히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

카테고리 없음 2025.09.14

청 [Blue] - 5(완)

문이 가볍게 열리고 습하고 달콤한 향이 하얗게 방 안으로 퍼져나갔다. 아침 산책이 끝나고 새로운 룸메이트와 함께 맞이하는 아침. 그녀는 머리의 물기를 잘 건조된 수건으로 어루어 감싸고, 침대 위에서 낮아진 도시를 바라보고있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쯔반, 아마도 같이 지내려면 널 좀 씻겨야 될 것 같은데?" 쯔반은 이에 들은 체 하지 않고 귀가 뒤쪽을 향해 살짝 젖혀졌다 다시 앞쪽으로 돌아갔다. 역시 인간이든 고양이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는 것이 맞다. 커다란 그릇에 많은 양의 콘푸로스트를 담으며 그녀는 말했다. "아침을 먹고 발현지에 너랑 함께 다녀올거야." 쯔반은 그릇과 씨리얼이 부딫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응하고,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했다. '너도 처음 가는 곳이지?' 창문방향 바닥..

카테고리 없음 2025.09.12

청 [Blue] - 4

전날 오후 1시. 알록달록 물감이 튀어 바닥이 너저분한 화실. 그안에서 한 여자가 홀로 캔버스를 다듬으며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파레트에 물감을 짜내며 생각한다. 손가락으로 콧등을 가볍게 잡고 숨을 참아본다. 그녀의 버릇이다. '먼저 전화를 걸어볼까, 아니면 기다려 볼까?' 그리고 그녀 앞에 놓여있는 젯소가 칠해져 건조된 캔버스에 붓을 올렸다. 붓은 파란색으로 중형 캔버스 구석구석 꼼꼼하게 칠을 하고, 엄지손가락 크기만 한 불균형한 원 형태를 여러 원색으로 그리고 속까지 칠해 나갔다. 파란 바탕의 여러가지 색깔의 원들. 그녀는 원 안에 사람의 표정들을 하나하나 짙은 회색의 물감으로 그려본다. 우는 얼굴, 웃는 얼굴, 화가 난 얼굴, 그리고 평온한 얼굴들. 그 여자는 ..

카테고리 없음 2025.09.09

청 [Blue] - 3

- 전날 저녁 9시. 남자의 짧지만 다듬어진 턱수염은 평범해보이는 직장인과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피곤한 표정을 짓고 노트북 모니터를 쳐다 보던 남자는 화면 구석에 뜬 메시지 알림을 봤다. 그리고 이내 집중력의 흐트러짐을 느끼고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캔을 따며 메신저를 클릭했다. ' 24년 12월 16일/ 아마 네가 원하던 것도 얻을 수 있을것 같은데 메시지 확인하면 전화줘 ' 남자는 잠시 생각했다. '나는 많은 것을 잃은 남자.' 그 남자는 본인을 늘 그렇게 불렀다. 잃어버렸기에 되찾고 싶어하는 남자. 남자가 몸을 뒤로 기대자 의자는 끼이익 소리를 내며 뒤로 젖혀졌다. 남자는 천장의 조명을 멍하니 쳐다보며 또 생각했다. '어차피 연락이 왔다는건, 나도 또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겠..

카테고리 없음 2025.09.09

청 [Blue] - 2

쯔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먹는다면 내 분노를 없애려고 먹는거겠지?' 쯔반은 파란 눈동자에 동그란 동공으로 츄르를 핥으며 그녀를 본다. 확실히 거짓말이다. 그녀는 쯔반을 알고 지냈던 3년간 쯔반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길고양이치고 성격이 느긋하고 차분한게, 이미 많은 감정들을 소화 시켜버린 것처럼 보였고,이미 '분노'는 쯔반에게 필요가 없을것 이다. 아마도 분노를 먹을 필요가 없다면, '사용'이 목적일텐데. "그래, 뭐 더는 물어봐도 우리는 그 이후를 보면 알 수 있으니깐." 그녀는 길게 물어보지않고 다음 할 말을 이어가며 남은 츄르를 끝까지 손끝으로 짜내어 손가락을 쯔반에게 갖다 주었다. 사냥의 시간이 지나가면 어차피 알기 싫어도 분노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게 된다. "인지자, 구도자...

카테고리 없음 2025.09.08

청 [Blue] - 1

- 일을 할 시간이 오고 있다. 그녀의 방은 온통 파란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파란색 벽지, 파란 이불, 파란색 시트의 소파. 시선이 머무는 모든곳은 파란색. 그리고 강렬한 주광색을 내뿜는 길다란 스탠드 하나. 방 안을 따뜻한 색으로 덮어주고 있다. 아직은 어둠이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4시, 아니 새벽이다. 모두가 최후의 수면을 취하고 있는 이 시간에 주거중인 오피스텔 밖으로 나와 그녀는 방향을 정하지 않은것 처럼 발길이 가는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걷다가 걷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한 건물을 발견하고 건물에 가까이 가기전 휴대폰전원을 끄고, 건물을 똑바로 바라보고 선 뒤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건물을 향해 전력질주. 그대로 창문조차 없는 노출콘크리트..

카테고리 없음 202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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