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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Overture] - 1

Handevil 2025. 9. 1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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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Overture)

유년 시절의 꿈을 꾸었다.
갑작스러운 열병에 걸린 나는 약을 먹고, 한기를 느끼며 잠을 청했다.

몸은 떨렸고, 머릿속에서는 알 수 없는 공간감이 피어났다.
나는 무한히 작아지면서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은 끝없이 확장됐다.

거대하고 어두운 공간. 그 중심에는 내가 있었고,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점으로 변한 나는 세상의 모든 물질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보았던 자동차, 거리, 사람들, 내가 경험했던 모든 순간과 기억들이 물체가 되어 급류처럼 쏟아져 흘러나왔다.

그 길고 거센 흐름을 나는 그저 바라볼 뿐, 개입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본 그 흐름은 하나의 거대한 기둥이 되었고, 나는 서서히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나는 꿈에서 깨어 났다.

그곳에서의 공포는 현실에 상상할 수 있는 존재할 수 있는 공포를 아득히 넘어선,
혼돈스럽고 표현할 방법이 없는 거대한 두려움이었다.

다시 잠에 들면 또 같은 곳에서, 모든 것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


다음 날 오전, 선우 진의 집.

밖은 밝아진 대낮이 되었다.

남자는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손을 머리맡으로 움직여 손끝에 닿는 감각으로만 휴대폰을 찾았다.
시간을 확인하려 손에 쥔 그의 휴대폰에서 어젯밤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24년 12월 16일 / 아마 네가 원하던 것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메시지 확인하면 전화 줘.’

확실히 어제의 일이 맞았다.

선우진은 몸을 일으키고 다시 구부정한 자세로 손바닥에 턱을 괴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이 최우선으로 바뀌는 과정은 생각보다 피곤하고 머리 아픈 일이었다.

욕실로 들어간 선우진은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로 온몸을 칠하듯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길게 자라난 턱수염을 짧은 가위로 잘라내고 셰이빙폼을 산타클로스의 턱수염처럼 뿌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라 조금은 단정한 모습으로 바꾸려는 노력이었다.

선우진은 익숙한 듯 찬장을 열어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욕실에는 환풍기 소리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하얀 수증기와 그보다 조금 더 어두운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하얀 백색의 핀 조명은 연기와 증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비췄다.

실내에서의 흡연을 끊지 못한 나쁜 버릇이었다.
여전히 담배를 입에 문 채 거울을 보며 면도기를 들었다.

“…스윽.”
면도기가 턱에 과하게 닿으며 이질적인 마찰음이 났다.
들리면 안 되는 소리는 역시 빨간색의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다.

선우진은 턱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다시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온몸과 턱에 묻은 셰이빙폼을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면도는 오늘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다.

몸의 물기를 대충 털고 거실에 나와 턱에 난 상처를 바라봤다.
매번 하던 일이었지만 이번 일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직 깔끔하게 면도가 덜 된 까끌한 수염에, 말리지 않은 머리에는 가볍게 헤어 에센스만 바르고
선우진은 나갈 준비를 했다.

카메라 바디와 50mm 단렌즈, 그리고 멀리서 피사체를 압축해 낼 망원렌즈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가방에 잘 말아 넣은 우의를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물기가 덜 마른 단발머리에 회색 맨투맨, 통이 넉넉한 면바지 차림,
그리고 각진 백팩을 멘 선우진은 여행을 떠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현관에 충전기에 연결해 둔 여러 개의 무선 이어폰 중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 한 병을 챙긴 뒤 선우진은 밖으로 나갔다.


-


오전 8시 기민정의 집 앞.

나는 집 밖을 나서며 손에 든 물병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어제 그녀와 나, 그녀와 다른 이들의 계약을 통해 익숙한 팀이 결성됐다.

오래된 구축 2층 주택의 야외 계단을 내려오며,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에 곧 겨울이 다가옴을 느꼈다.
마음을 강렬하게 찔러왔던 계절도 겨울이었다.
이제는 단지 온도의 저하로 기억이 되살아날 뿐,
조금은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의 실수처럼 느껴진다.

그녀와의 계약과 별개로 쯔반과의 계약을 했지만,
댓가가 겹쳐지지 않기 때문에 이중계약은 아니다.
나는 대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점점 나는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

물론 아주 좋은 쪽으로..


-


선우진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발현지의 주소와 발현 시간. 그것이 그가 가진 모든 정보였다.
그래서 그는 자꾸만 그녀에게 메시지로 물어보았다.

‘선생님, 저는 지금 발현지로 출발합니다’

‘선우진입니다. 조사에 필요한 내용에 추가 전달 사항은 없을까요?’
답변은 없었다. 메시지에 ‘1’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선우진입니다. 연락이 안 되시는데, 전화 통화 가능하시다면 전화 주실 수 있습니까?’
여전히 확인하지 않았다.

‘?’
그는 물음표 하나를 보내고, 달리는 전철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때마침 다리를 건너는 순간이라 한강과 고층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성이 많고 예민한 성격 때문에 모험을 꺼리는 그는, 고층 건물의 높이를 마음속으로 가늠하다가 
이내 바람 부는 날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리고 불안한 생각을 멈췄다.


그는 창밖에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오늘 비 소식이 있던데, 비가 오긴 올까?’


인지자의 목적지까지는 앞으로 두 정거장 남았다.

프롬포트 : 도시, 도시 위를 달리는 지하철, 가을 날씨.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짭조름한 파도 냄새와 울창한 숲의 청내음이 난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 몸은 앉아 있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공간에 있다고 느꼈다.
숨을 길게 참아 보았다.

도착 전에 잠시 명상을 했다.
사실 명상이라기보다, 마음의 긴장감을 최대한으로 털어내려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전철의 정차 안내 방송이 나오자, 나는 가방과 손에 들고 있던 소지품을 챙기며 하차를 준비했다.
머리가 조금 맑아진 것 같고, 긴장감도 약간 풀린 듯했다.

카메라에 충전된 배터리를 끼우고, 메모리카드를 넣었다.

오늘 나는 ‘건축물 촬영’을 위해 이곳을 찾은 포토그래퍼이다.
부동의 피사체를 촬영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 만큼은
가만히 있는 피사체를 중심으로 발현지의 시간과 공간을 사진으로 기록할 생각이었다.

출입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고,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턱끝에 조금 찬 기운이 느껴졌고,
면도하며 베인 상처가 조금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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