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곡 [Overture] - 4

오전 10시 30분, 비즈타워 290 앞.
기민정은 발현지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직 ‘그녀’와 쯔반, 선우 진을 만나지 못했다.
어제 ‘그녀’와의 계약, 그리고 쯔반과의 계약을 마친 기민정은 어쩐지 밝은 갈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구도자’가 되고 나서, 아니 자신이 구도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 그녀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자신을 옭아매던 집착도 내려놓게 되었고, 무엇보다 ‘감정’이라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던 인생이 한순간에 달라져 버렸다.
건물의 모든 면이 파란 통유리로 감싸져 있는 건물.
길 건너 멀리서 그녀는 오른쪽 눈을 감고, 건물 아래층부터 꼭대기층까지 하나하나 세어 보았다.
아마도 햇빛을 반사하는 파란 건물을 향해 한쪽 눈을 감고 찡그리며 바라보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민정은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받고 곧장 3층 창가 자리에 앉아, 비즈타워로 오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감시하듯 바라보았다.
아직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 방향이라, 한쪽 눈을 감고 찡그리고 있는 그녀는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핑거 페인팅’을 하듯, 그 사람 쪽으로 스윽 문대는 느낌의 손짓을 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약 스무 명 정도에게 그런 ‘물감’을 묻히고 나서 텀블러를 들어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아까부터 비즈타워 앞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는 여자에게서 수상함을 느꼈다.
엄지손가락을 다시 들어 그 여자에게도 ‘물감’을 묻혔다.
그녀는 내 이름을 물었다.
이제 계약이니 역시 통성명은 해야겠지.
“선우 진입니다. 성은 선우, 이름은 진.”
나는 그녀에게 카드 지갑에서 구겨진 명함을 건넸다.
“스튜디오 누베, 선우 진. 역시 사진작가처럼 보였는데, 제 생각이 맞았어요. 그리고 저는 손시하.”
그녀는 이름만 말해주고 다시 멍하게 가로수 이파리를 바라보았다.
“아, 아저씨. 저는 학생이라서 그냥 아저씨라고 부를게요. 대신 저한테는 말 놓으세요. 존댓말 들으니까 불편하네요.”
맞는 말이다.
“어, 그래. 그리고 아마 앞으로 자주 마주칠 것 같으니 혹시 어떤 일이 생기면, 우리는 원래 ‘알고 있던’ 사이라고 해두자.”
손시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인지자들끼리 인지를 해버렸으니 큰일이 나버렸지만, 뭐 어쩌겠어요. 서로 인지자를 찾지 못했다고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전철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턱수염에 손을 올렸다가, 턱수염 대신 붙어 있는 반창고를 문지르며 ‘별일 아니겠지’ 생각하고 다시 카메라를 들고 일어났다.
아마도 이젠 다른 경쟁자가 없다 판단이 돼서 건물 정문을 향했다.
건물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어떤 '향기'가 스쳤지만 별생각 없이 지나쳐 빌딩 관리사무실로 향했다.
로비 벽면에 붙은 커다란 디지털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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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정은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턱을 괴며 창밖의 남녀를 보았다.
흥미로운 듯 바라보던 중, 테이블 기둥 사이로 쯔반이 걸어 나왔다.
쯔반이 소파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흥미로운 조합이네, 저 둘.’
기민정은 여전히 그 둘을 응시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쯔반, 아무래도 저 여자는 우리 과인 것 같아. ‘물감’이 많이 필요하겠는데?”
쯔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뒷발을 하늘 높이 들어 털을 핥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칠을 진하게 하진 마. 하지만 저 여자애를 다시 본다면, 그땐 진한 색으로 칠을 해줘.’
기민정은 쯔반의 말을 들으며 쯔반의 뒷발에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